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헨리 귄 제프리스 모즐리 (문단 편집) == 그의 생애와 업적 == 박물학자인 헨리 노티지 모즐리(Henry Nottidge Moseley)의 아들로 출생했다. [[옥스퍼드 대학교]]의 트리니티 칼리지를 졸업하고, 1910년 맨체스터 대학 강사로 있었다. 그가 대학 강사로 있을 때 [[어니스트 러더퍼드]]의 지도로 [[X선]] 연구를 하였다. 연구 초기에는 [[라듐]] B 및 라듐 C의 원자 1개의 붕괴에 의해서 방출되는 알파 입자 평균 개수의 측정 등에 관한 실험을 하였다. 그러다 독일의 이론물리학자 [[막스 폰 라우에]]의 X선 산란(散亂) 실험에 흥미를 가지게 되어, 친구 찰스 골턴 다윈(Sir Charles Galton Darwin)과 협력하여 X선 산란 연구를 시작, 특성 X선의 연구결과 '모즐리의 법칙'을 발견하였다. 이것은 여러 원소의 특성X선 스펙트럼을 실험적으로 연구하여 그 파장과 원자번호 사이에 간단한 관계(파장의 제곱근이 원자번호에 반비례)가 성립한다는 것을 발견한 것으로서 원자구조론에 크게 기여하고 현대 [[주기율표]] 자체의 이론상 근거가 된다. 또한 주기율상의 미발견원소의 확인, 미측정 [[스펙트럼]]의 파장 예측 등 X선 연구에 큰 업적을 남겼다. 그러나 [[제1차 세계 대전]]에 [[공병]] [[장교]]로 자원 입대하였으며,[* 헬리콥터 조종사로 입대했다는 말도 있지만, 그 시기에는 극히 원시적인 형태의 시험적인 헬리콥터만 존재했던 것을 고려하면 잘못된 정보다. 1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느려터진 복엽, 삼엽기들이 날아다니던 시대였고 헬리콥터가 본격적으로 전장에 투입되기 시작한 건 [[6.25 전쟁]]부터다.] 1915년에 [[갈리폴리 전투]]에 투입되어 그곳에서 전사하였다. 관련된 연구주제를 연구한 다른 학자들은 전부 노벨상을 받았고, 살아있었다면 모즐리도 분명 [[노벨상]]을 받았을 것이기에 아쉬운 죽음이다. 모즐리를 아꼈던 스승 러더퍼드는 모즐리의 전사 통지를 받고는 "이것이 [[제1차 세계 대전]]이 [[영국]]에 입힌 최대의 타격"이라며 크게 슬퍼했다고 한다. 이 소식을 듣고 [[윈스턴 처칠|처칠]]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 "과학 기술의 꿈나무들이 전쟁에서 죽는 꼴을 볼 수 없다"라고 한 것이 현재의 [[전문연구요원]] 제도의 시작이라고 한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